독일박사과정 D+2) 독일에서 언어가 나에게 끼친 영향들
사실 박사유학을 독일로 정한 큰 이유는 전공한 분야의 전문성 및 워라벨이 실현 가능한 근무환경이 잘 조성된 나라가 독일이라는 것이 큰 몫을 했지만, 그 외에도 저는 사실 영어를 딱히 잘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한국을 떠나기 전에 영어를 아주 잘했다면 영미권 국가의 유학을 더 심도 있게 고려해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유학 초반 한국에서 독일로 막 떠나왔을 때는 순진하게도 '독일에서 박사과정을 하고 일을 하고 싶은 것이니 독일어만 잘하면 되겠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어학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현실을 잘 파악하지 못해 독일어를 배우는 것에만 몰두하였습니다.
그렇게 독일어를 8개월간 열심히 배우고, 어학기간이 끝나갈 때쯤 단비 같은 면접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최종 면접을 보러 오라는 이메일에는 청천벽력 같게도 이러한 내용이 쓰여 있었습니다. „면접을 대부분 독일어로 진행되나, 이미 연구했던 주제에 대한 발표는 영어로 준비해오세요.“ 어머나… 가뜩이나 영어를 잘 못했는데, 독일에서 8개월간 독일어를 머릿속에 집어넣느라고 그 못했던 영어는 더욱 못하게 되었습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긴 했지만, 어찌 잡은 기회인데 아쉽게 날릴 수 없으니 3일간 발표할 내용을 달달 외워 입에 붙여 면접에 어찌어찌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쁜 것도 잠시, 출근날짜가 다가올수록 초조해졌습니다. 아직 독일어를 잘하는 게 아닌데 그렇다고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사기를 친 건 아니었지만 마치 사기 친 사람의 마음이었다랄까요. 흔히들 이렇게 말합니다. 외국에 살며 외국어를 배울수록 본인이 할 수 있는 언어는 0개국어로 수렴한다고. 독일어를 아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영어는 안 쓰니 까먹어가고, 심지어 모국어인 한국어 능력조차 후퇴하니 0개국어가 틀린 말은 아닌 듯합니다.
그 당시 스트레스의 주요 원인은 언어능력의 부족으로 인해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100%로 옳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 추측은 30-40% 정도는 옳았습니다. 독일 사회에서 연구를 한다는 것은 협업이 매우 중요하고, 팀으로 일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끊임없는 회의와 동료들과의 토론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말을 잘 못한다는 것은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또한 남들이 나에게 실망을 하거나 업무능력을 저평가할까 매일매일이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짧은 직장생활이 끝나고, 직장 근처의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연구소에 소속된 WiMi (연구원, Wissenschaftlicher Mitarbeiter 의 줄임말)으로 일할 때에 당시 연구소에 저를 제외하고서 외국인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독일어를 아주 잘하던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3년이라는 시간을 다른 동료들과 같이 일할 것이니 잘 어울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앞선 마음과는 달리 이미 친한 사람들의 틈을 파고드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당시 스스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아.. 내가 말을 잘 못하나? 너무 어눌하게 하나? 말이 재미없으니까 이야기를 안 하려고 하는 건가?' 이렇게 자책과 언어를 잘 못한다는 자괴감, 위축감에 찌들어갔습니다. 그렇게 3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결국 그 갭을 극복하지 못한 채 이직을 하게 됩니다.
이직을 하면서도, 새로운 직장에 마음이 들뜨기보다는 여기에서는 잘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하지만 독일에서의 지난 4년이라는 시간을 가만히 있었던 게 아니라, 계속 독일어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니까 새로운 직장에서 새롭게 시작하자 라는 희망도 어렴풋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직장을 구하고 1년간 참 게으르게도 독일에 살며 일을 하면 독일어를 접하는 시간이 늘고 당연히 독일어 실력이 향상되리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공부를 안 했으니 언어 실력이 알아서 나아질 일은 없었지요. 그 후 정신 차리고 일주일에 한두 번이라도 VHS 독일어 수업을 나가거나, 꾸준히 독일어 과외를 받았습니다.
예상과는 다르게, 새로운 직장에서의 적응은 이전 직장에 비해 매우 수월하였습니다. 아직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직장에서 동료들과 즉각적인 토론이 어느 정도는 가능하고, 적어도 약간의 준비를 한다면 남들보다 시간이 조금 더 많이 소요되기는 하지만 발표를 하거나 혼자 업무를 수행하는데 문제가 없습니다. 때문에 스스로 업무를 수행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은 많이 사라졌습니다. 그렇다 보니 열린 마음으로 일을 하는 데 있어 더 적극적으로 참여 가능하고 동료들과 여러 이야기를 하며, 이 집단에서 외국인이라는 이방인이 아닌 동료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단순히 언어의 문제 같아 보이지만,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하다 보니 문제는 단순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Uni 즉 대학 소속 연구소는 생각보다 폐쇄적인 곳이 많습니다.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섞여 일하는 곳이라면 그러한 폐쇄성이 감소할 수 있겠지만, 대부분은 동일 대학에서 학부, 석사를 마치고 박사과정에 들어온 사람들이 많으며, 석사논문을 쓴 연구소로 박사를 지원하는 경우도 대다수이기에 서로서로 이미 많이들 아는 사이입니다. 이렇기에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유대감을 쌓아온 그룹이 결성되고, 이는 새로운 구성원을 잘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렇게 폐쇄성이 강해집니다. 아마 이를 극복하는 방법이라면, 그룹 구성원 중 본인에게 호의를 가장 많이 보인 약한 고리를 찾고 그 사람과 친해져서 그룹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이 있겠지만, 제가 직접 시도해본 적이 없어서 확답은 못 드리겠네요.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시도해보겠습니다.
대학연구소에서 겪었던 문제를 왜 현재의 직장도 연구소임에도 여기에서는 겪지 않는 것일까요?
아마도, 현 연구소에도 여전히 독일인의 비중이 외국인보다는 높지만 그래도 외국인 연구원들이 많은 편이고, 다른 연구원들도 하나의 대학교 출신이 아닌 여러 대학 출신 사람들이 섞여 있습니다. 따라서, 어느 정도 동료로서의 유대감은 있지만 또한 적정 사회적 거리가 유지된다고 해야 할까요. 간혹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따로 모여서 만나기도 하고 같이 운동도 하지만 그 그룹의 크기가 작고, 폐쇄적 분위기는 아니어서 누구든 원하면 새로운 구성원으로 언제든 참여 가능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는 듯합니다. 현재 저는 독일의 문화를 다 이해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점차 더 많이 이해하며 그룹에 잘 스며들도록 노력하는 중입니다. 언젠가는 가능하길 바래봅니다.
오늘은 독일에서의 독일어 그리고 영어도 잘 못하는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고충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풀어보았습니다.
독일에서 살아가고 공부하는 모든 여러분들, 매일의 나날이 쉽지는 않겠지만 너무 스스로만을 탓하지 말고 힘든 날들을 보듬어가며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조금 더 따뜻한 날을 맞이할 수 있을 거예요. 힘내세요. 오늘이 부디 이 글을 읽은 당신에게 따뜻한 날이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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